'멋대로 해라'는 명령에 복종하면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명령에 불복종할 자유가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만 나는 무엇이든 멋대로 할 수 있다. 자, 멋대로 해봐. 이것도 명령인가?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 니콜러스 로일
- 누군가의 엉터리 과제 수정본 -
창작자로서 Ai-Da의 예술적 지위에 대한 분석 – 바르트와 푸코의 논의를 중심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팀과 로봇공학 팀, 예술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한 끝에 2019년 2월, 아이다(Ai-Da)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열린 단독 전시회 ‘Unsecured Futures’로 세상에 등장했다. 아이다는 눈 대신 카메라, 팔 대신 로봇 팔, 뇌 대신 AI(인공지능)를 탑재하고 있는 로봇으로 세계 첫 휴머노이드 로봇 화가로 세상에 소개되었다. 그녀를 소개하는 공식 홈페이지는 아이다의 작품을 예술작품이라고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AI-Da creates art, because art no longer has to be restrained by the requirement of human agency alone.”(Ai-Da, n.d.) 2021년 아이다는 런던 디자인 미술관에서 놀라운 전시를 진행한다. 바로 자화상(self-portrait) 3점을 전시한 것이다.(Brown, 2022) 아이다로 하여금 우리는 너무나 많은 혼란 속에 놓이게 된다. 현대화가인 아이다와 현대예술작품인 아이다. 자기(Self)인 아이다와 자화상(self-portrait)을 그린 아이다. 도대체 아이다는 무엇이며 예술가란 무엇인가? 아이다는 아이다로 존재함으로써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전통적으로 예술가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연상을 낳는다. 책먼지 날리는 골방에서 고독하게 홀로 앉아 묵묵히 글을 쓰는 소설가, 길을 거닐다가 문득 떠오른 것들을 자신의 공책에 다급히 써내는 시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화방에서 골몰하며 작품과 씨름하는 화가, 며칠간 씻지도 자지도 않고 자신을 갉아먹으며 작품을 구상하는 조각가와 건축가. 예술가라는 단어는 신비하고 고독한 개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美)를 향한 인간의 고독한 투쟁, 끊임없는 인내의 과정 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인간적인 아름다움. 전통적으로 예술행위는 가장 인간적인 몸짓이자 성스러운 실천이다. 따라서 아이다가 예술적 행위를 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반감의 대상이다. AI가 작가 행세를 한다는 것, 화가 흉내를 낸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따라서 아이다는 절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예술가가, 그리고 예술이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말이다.
(2024.01 추가 - 글에서 전통적인 예술가라고 쓰인 부분은 근대적인 예술가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한참을 설명해야 하지만, 필자의 지식 부족 및 귀찮음으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고독한 예술가라는 생각은 근대의 발명이다' 정도로 넘어가고자 한다.)
아이다는 전통적인 예술가라는 이해의 정반대에 서 있다. 아이다에게 예술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지, 혹은 부여해도 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아이다가 존재함으로써 제기되는 바로 그 질문 ‘예술가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롤랑 바르트와 미셸 푸코의 ‘저자’성과 관련된 논의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들은 ‘해체’라는 데리다의 테제 아래에서 작가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작품이란 무엇인지 해부한다. 바르트는 저자를 탈신비화함으로써 텍스트의 중요성을 상기하고, 저자의 완전한 제거 혹은 저자의 죽음을 통해 독자와 수용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세계에서는 아이다가 예술가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푸코는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텍스트를 강조한다. ‘작가’라는 사람으로 번역되는 담론을 살피기 위해서는 결국 텍스트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바르트가 제시하는 아이디어, 즉 창작물 그 자체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푸코의 논의를 통해 저자의 기능이 무엇인지, 나아가 창작자와 예술가는 어떤 존재인지 규명하고자 한다.
롤랑 바르트의 에세이 「저자의 죽음」은 아이다의 지위를 규명하려는 우리에게 두 가지 독특한 생각을 제시한다. 저자라는 개념을 지우고 필사자(scripteur)로 대체하면서 창작자의 행위를 표현이 아닌 단순한 기재(inscription)의 차원으로 돌려놓는 점과 ‘저자의 죽음’이라는 은유를 통해 작품에 대한 저자와 창작자의 지위를 약화하고 그 권위를 독자와 창작물의 수용자에게 이양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바르트에게 ‘저자의 죽음’이란 저자를 텍스트 밖으로 제거하는 일이다. 그는 텍스트가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언어)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바르트, 1997, p. 32)이라고 보았다. 저자가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만들어진 사전”(바르트, 1997, p.33)을 통하여, 즉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 (바르트, 1997, p. 32)을 엮어내어 “이전의 몸짓을 모방”(바르트, 1997, p. 32)하는 것에 불과하다. 바르트에게 저자란 결국 필사자이며 단순한 기재를 수행하는 자다. 바르트는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권위를 탈신비화하며 텍스트를 이루는 것들의 집결 장소로써 “독자의 탄생”(바르트, 1997, p. 35)을 외친다. 독자는 작품의 과거와 관계없이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으는 누군가”(바르트, 1997, p.35)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논의가 시사하는 두 가지 지점을 아이다의 창작 행위에 적용하기에 앞서, 바르트 그 자신도 「저자의 죽음」에서 저자의 범주에 대하여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음을 적어 둘 필요가 있다. 그는 창작자를 통해 창작물을 이해하는 것이 허황됨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비평 또한 대부분의 경우, 보들레르의 작품은 인간 보들레르의 실패이며, 고흐의 작품은 곧 그의 광기이며,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은 그의 악덕이라고 말한다.”(바르트, 1997, p. 28) 바르트의 저자라는 개념은 비록 모호하지만 바르트가 기호학자로서 활동하였다는 점과 언어 또한 기호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그가 텍스트를 여러 가지 기호(언어)가 집약된 총체로써 바라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아래에 고흐의 그림과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텍스트의 범주에 포함되며 우리는 바르트의 논의를 아이다의 창작 행위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저자, 즉 창작자가 결국엔 필사자와 다르지 않다면, 기존에 존재한 기호들을 재조합하고 조작하는 방식으로 창작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AI로 생성되어 로봇 팔로 구현된 아이다의 그림은 창작물로 놓일 수 있으며 아이다는 자신의 그림을 만들어낸 창작자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다. AI가 데이터 분석과 학습을 통해 결과물을 생성한다는 것은 결국 기존에 있던 기호들의 집합을 모아 재조직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논의 위에서 아이다는 창작자, 즉 “현대적인 필사자”(바르트, 1997, p. 31)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바르트의 논의 위에서 우리는 아이다를 창작자로 상정할 필요조차 없는데, 아이다가 직조해낸 창작물의 집결장소는 곧, 그 창작물의 소비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다가 생성한 그림을 보고 집결된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의 몫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창작자의 존재 밖에서 창작물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아이다의 존재 자체에 무관심하게 함으로써 아이다가 창작해 낸 창작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예술가로서 아이다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회피할 수 있다.
바르트의 논의는 창작물의 수용자를 작품의 해석 및 수용의 중심에 놓기 위해서 창작자의 존재를 폐기한다. 하지만 바르트의 논의에는 명확한 허점이 존재한다. 미셸 푸코가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제시하듯 ‘필사자’와 같은 관점에 창작자를 위치시키는 것은 되려 “’선험적인 것’의 보호 아래 저자(창작자)의 특권들을 유지시킬 가능성”(푸코, 1989, p. 246)이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작품’이라는 애매모호한 것에 수용자가 집중하도록 만듦으로 하여금 창작의 과정(글쓰기)이 초월적인 지위를 부여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푸코, 1990, pp. 244-247) 다시 말해, 저자를 탈신비화하고자 했던 바르트는 되려 저자를 신비화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찰스 번스타인(1979)의 시집 「Poetic Justice」를 보면 문법과 단어의 경계를 벗어난 시를 볼 수 있다. 저자에 대한 모든 이해에서 벗어난다면 누가 그의 시를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싶지만, 바르트의 논거처럼 저자를 그저 관심 밖의 대상으로 산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문학과 예술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든 것이 분석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남는다. 저자를 죽인다면 어떤 예술이 좋은 예술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저자가 필사자라면 무엇이든 필사해도 되는 것인가? 저자의 죽음이란 저자가 가지고 있는 행위와 기능을 비평의 범주에서 배제함으로써 접근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된다. 따라서 필사자 개념을 바탕으로 아이다를 창작자의 지위로 올려놓는다면 아이다는 물론 그 누구의 창작물이라도 수용자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텍스트와 마주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비판되어야 할 부분이 발견될지라도 그것은 그 창작물의 단독적인 오류로 남게 된다.
하지만 바르트의 글에는 부정하기 힘든 것 또한 담겨 있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바르트, 1997, p. 27)라는 것, 즉 글쓰기의 과정 속에 저자라는 존재가 텍스트로 치환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글쓰는 주체가 끊임없이 사라”(푸코, 1990, p.243)진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바르트가 행한 오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푸코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되풀이하는 대신 저자의 소멸로 인해 자유로워진 공간을 찾아내고, 틈새와 균열의 분포를 추적하고, 이 소멸로 인해 자유로워진 빈자리와 기능,”(고규진, 2015, p. 241) 즉 저자 기능을 이야기한다. 푸코(1990, p. 256)가 분석한 저자 가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I. 저자 기능은 담론의 세계를 둘러싸고 한정하며 분절하는 사법적, 제도적 체계와 연결되어 있다 (저자들이 다양한 형태의 작업물을 생산함에 따라 사법과 제도의 필요 아래 저작권 같은 개념이 등장하며 저자의 지위가 자리 잡으며 따라서 저자 기능과 법, 제도는 상호구성적이다)
II. 저자 기능은 모든 담론들에 대해서, 또 모든 시대와 모든 형태의 문명에서 획일적이고 동일한 방식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예컨대 과학과 문학의 영역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저자 기능이 확립되었으며 시간에 따라 저자 기능은 변화하였다, 즉 저자가 속한 영역과 시점에 따라 저자 기능은 지속적으로 변모한다.)
III. 저자 기능은 담론 산출자에의 자발적인 귀속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고 복잡한 일련의 조작에 의해서 정의된다 (저자 기능의 구성은 특정 저자에 대한 저자성/특성을 규정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의 집합 속에서 이루어진다.)
IV. 저자 기능은 순수하고 단순하게 실제의 한 개인을 가리키지 않으며, 따라서 몇 개의 자아를, 각기 다른 개개인들이 차지할 수 있는 몇 개의 주체-위치(positions-sujests)를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다. (저자 기능을 구성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구성된 저자는 실재 저자와는 다른 양식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푸코에게 ‘어떤 담론을 형성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자’로서 저자는 실재 저자와는 다른 구성물이다. 그것은 저자 기능으로 치환되어 말할 수 있는 구성된 저자인 것이다. 따라서 푸코는 텍스트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저자라는 말 자체가 실재와는 분리된 가상적인 실체이며 텍스트가 특정 담론의 “창설 가치를 갖는 것은 그것이 그 저자, 바로 그 저자의 텍스트인 한에서 이고,텍스트로 되돌아와야 하는 것은 그 때문, 즉 그것이 그 저자의 텍스트이기 때문”(푸코, 1990, pp. 261-262)이다. 다시 말해 텍스트를 이해해야 저자 기능, 혹은 저자로 대변되는 어떤 담론의 당위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논의와 비교했을 때 푸코의 관점이 갖는 강점은 텍스트로 하여금 작가 기능에 대한 비평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푸코(1990, p. 256)는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회화와 음악과 기술 등의 분야에서 이 저자 기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지 않음을 언급한다. 다만 그는 “담론의 질서 속에서는 책 이상의 것의 저자가 될 수 있다는 것 – 그 속에서 다른 저자들과 다른 책들이 각기 자리 잡게 될 이론, 전통, 연구 분야의 저자가 될 수 있다는 것”(푸코, 1990, p. 256)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저자들은 ‘초담론적인(transdiscursive)’ 입장에 있다”(푸코, 1990, p. 256)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앤 래드클리프가 “19세기초의 괴기소설들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런 측면에서 그녀의 저자로서의 기능은 자기 작품을 초월했다고 말할 수 있”(푸코, 1990, 257)는 것처럼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음악만을 만든 것이 아니라 ‘무한한 담론 가능성을 세워’ 자신의 치부와 약점을 드러내는 록(Rock) 음악의 어떤 형태를 가능하게 한 저자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푸코의 논의 또한 저자, 텍스트, 독자가 창작자, 창작물, 수용자로 치환되어 예술 전반에 관한 논의로 확장할 수 있다.
푸코의 저자 기능은 저자에 대한 지식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봄으로써 텍스트를 통해 저자 기능이 시사하는 담론을 되짚어볼 필요성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는 기존에 존재하는 창작자라는 구성물이 혹은 창작자로 대변되는 담론은 창작물과 평론가, 작품의 수용자를 비롯한 여러 행위소들이 연결망을 형성하여 작가에 대한 지식과 담론을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부르디외식으로 표현하자면 예술분야의 상징공간에서 상징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 비평가, 교수, 저명한 화가 – 특정한 창작물에 대하여 논의하고 어떤 담론을 형성함으로써 그 창자물을 만들어낸 창작자가 상징자본을 획득하게 되고 이로 하여금 예술가의 지위를 얻는다. 따라서 ‘아이다가 어떻게 그림을 그렸느냐, 아이다가 정말 주체로써 그림을 그린 것이냐?’와 같은 질문들은 ‘아이다가 어떻게 예술가로 구성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하지만 아이다의 창작물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아직 너무나도 부족하며 아이다를 중심으로 한 어떤 ‘담론’이 생겨났다고 보기 힘들다. 이를 다른 말로 치환하자 예술가로서 아이다는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푸코의 저자 기능을 살펴봄으로써 전통적 예술관이 허상임을 확인할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창작자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무엇을 창작했느냐가 중요하다. 그 창작물로 하여금 우리는 창작자 기능을 구성하고 논의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 예술관 때문에 아이다가 AI이기 때문에 창작자로서 분석되는 것이 터부시될 이유는 없다. 창작자(저자)의 지위, 저자에 대한 지식, 그리고 저자성은 결국 그 사람이 예술을 행하는 인간으로서 겪어온 어떤 고난과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창작물 그 자체와 창작물에 대한 분석,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담론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아이다가 자화상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아이다가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전통적인 예술관을 뒤흔듦을 살펴보았다. 아래의 그림은 실제로 아이다가 새로 장착한 팔로 그려낸 자화상이다. 나이프로 찍어낸 물감들이 모여 아이다의 얼굴을 추상적으로 담아낸 이 그림으로 아이다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이다의 그림으로 하여금 어떠한 담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이다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실체를 유려하게 그리기보다는 모자이크식으로 한 획 한 획 모아 자신의 형태를 추상적인 모습으로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아이다라는 안드로이드가 그려낸 그림이 가진 담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 창작자, 그리고 예술가라는 것 그것은 추상적인 담론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리하여 전통적인 예술관의 인간상에서 벗어난 안드로이드인 아이다 또한 예술가적 지위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

[1] 푸코의 저자 기능에 대한 간략한 해석을 괄호 속에 적어 둔다.
참고문헌
1. Ai-Da. (n.d.). Ai-Da. https://www.ai-darobot.com/
2. Brown, M. (2022, October 19). ‘Some people feel threatened’: face to face with Ai-Da the robot artist. The Guardian. Retrieved from https://www.theguardian.com/culture/2021/may/18/some-people-feel-threatened-face-to-face-with-ai-da-the-robot-artist
3. 바르트, 롤랑. (1997).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pp. 27–35). 김희영 (역). 서울: 동문선.
4. 푸코, 미셸. (1990). 저자란 무엇인가. 장진영 (역).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pp. 238-275). 김현 (편). 서울: 문학과지성사.
5. Bernstein, C. (1979). Poetic justice. Baltimore: Pod Books.
6. 고규진. (2015). 저자/저자성의 문제 – 바르트와 푸코의 영향을 중심으로. 독일언어문학, 67. 233-256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일단 모아두었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의 쓸모를 찾아서 - 시에 관한 소설 같은 “참으로 쓸모 있는 인간의 놀이”: 문보영 시집 「책기둥」의 지말, 앙뚜안, 스트라인스 연작시 산책하기 (3) | 2024.12.31 |
---|---|
기억 격차, 어설픈 기록 (3) | 2024.04.06 |
Friendly BS (1) | 2023.12.31 |
!!!BEST BOOKS for a BETTER LIFE!!! (2) | 2023.12.31 |
해명하자면… (2) | 2023.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