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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들 정리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김연신 역, 열림원, 2023)

<데미안>1919년 발표된 헤세의 장편소설로 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 중 하나이다. 서술자 에밀 싱클레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통해 친구 막스 데미안의 영향을 중심으로 자신의 성장기를 풀어낸다. 1장에서 싱클레어는 열 살이었을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며 자신을 둘러싼 두 개의 세계에 대하여 설명한다. 하나는 자신과 가족의 명료하고 청결한 낮과 빛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하녀들과 견습공들의 끔찍하고 유혹적이며 무섭고도 수수께끼”(14p.) 같은 밤과 어둠의 세계이다.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싱클레어가 공립학교의 학생들과 어울리던 어느 날 그의 일행은 악명 높은 프란츠 크로머와 동행하게 된다. 어른처럼 구는 그의 행위에 두려움을 느낀 싱클레어는 사과를 훔쳤다는 이야기를 지어냈고 크로머는 이를 밀미로 싱클레어에게 돈을 가져오도록 협박한다. 그는 결국 자신의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지만 크로머에게 주어야 할 금액에 미치지 못한다. 다음날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 돈을 건네며 그것이 자신이 가진 전부라고 이야기하지만 크로머는 이틀 뒤 자신이 휘파람을 불 테니 그때 금액을 모두 지불하라고 명령한다.

 

2장에서 싱클레어는 하굣길에 상급생인 막스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재조직하는데 데미안에 의하면 카인과 그의 후예들이 이마에 지니고 있던 표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이 두려움에 대한 보상을 위해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서사를 덧붙이게 되었다. 크로머의 과도한 요구에 싱클레어가 힘들어하고 있을 때 데미안이 나타나 그의 마음을 읽어낸다. 이후 크로머는 갑자기 싱클레어를 보아도 모르는 척했고 데미안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음이 드러난다. 크로머와의 일이 있고 몇 년간 데미안과 교제하지 않던 싱클레어는 3장에서 그와 함께 견진성사 수업을 듣게 된다. 어느 날 수업 중 선생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데미안과 눈빛을 교환하고 그와 다시 연결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미안은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는 싱클레어에게 존재가 남김없이 그 소망으로 채워져 있을 때(…) 그걸 실행하고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94p.)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데미안은 십자가에 처형된 두 명의 죄수의 이야기로부터 선과 다른 많은 것들이 악으로 환원되어버리고 있으며 이러한 분리를 거부할 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는 자기 마음 속의 계명, 즉 완전한 진심으로부터 나온다고 싱클레어에게 알려준다. 견진성사 전 마지막 종교수업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완전히 자기 자신 속에 들어가 있다는 걸 전율하며”(108p.) 느낀다.

 

4장에서 싱클레어는 St.의 고등학교 기숙사에 머문 기억을 회상한다. 싱클레어는 알폰스 벡이라는 상급생에게 이끌려 술집에 가게 된다. 이후 술집을 계속 들락거리며 싱클레어는 자신에 대한 쾌감에 가까운 혐오를 느낀다. 하지만 성적인 경험의 부재와 사랑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던 싱클레어는 이내 그러한 삶에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 한 소녀를 봄으로써 변하게 된다. 비록 그녀에게 다가가지는 못했으나 그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사모한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 싱클레어는 이내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기존의 생활을 청산한다. 그리고 그는 베아트리체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그는 자기 자신이면서 베아트리체이고 동시에 데미안인 어떤 얼굴을 완성해낸다. 이후 데미안과 술집에서 만난 일화를 떠올리다가 데미안이 말해주었던 자신의 집 문장에 대한 꿈을 꾸게 되고 문장의 새를 그리는 일에 착수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새 그림을 보냈고 5장에서 그는 데미안으로부터 새는 힘들게 싸워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만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46p.)라고 쓰인 편지를 받는다. 그는 헤로도토스 강독 수업 중 아브락사스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통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가진 어떤 신의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148p.)음을 듣고 데미안이 이야기하던 신이 바로 아브락사스임을 깨닫는다. 그는 산책하며 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아브락사스를 아는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6장에서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 교류하며 자신의 내면의 도덕률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싱클레어는 선과 악의 구분에 메달리는 학우 크나우어와 만나게 되었고 그가 자살하는 것으로부터 구하게 된다. 이후 크나우어는 그를 스승처럼 따른다. 크나우어와 관계를 맺은 무렵 그에게 새로운 여인의 형상이 떠올라 그것을 그린다. 이후 피스토리우스와의 관계에서 싱클레어는 일종의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가 과거의 것들에 얽매여 자신의 운명에 전적으로 투신하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피스토리우스라는 지도자를 보내고 싱클레어는 대학에 진학한다. 7장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이 그렸던 형상이 데미안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강렬한 이끌림을 느낀다. 이 이끌림에 따라 방황하던 싱클레어는 대학에 등록했고 그곳에서 데미안을 마주하여 그의 집으로 초대받는다. 데미안의 집에서 에바 부인을 만난 그는 그들과 교류하며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인지 탐색한다. 에바 부인으로부터 지속적인 내면의 사랑에 대해 알아가던 싱클레어와 데미안, 그리고 에바 부인은 각각 기묘한 일을 겪고 불길한 암시가 찾아온다. 8장에서 이 불길한 예감은 전쟁이라는 형태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싱클레어가 내면 깊이 에바 부인을 갈망하고 있을 때 데미안이 말을 타고 나타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과 작별을 고하고 데미안처럼 전쟁에 참전한다. 싱클레어가 깊은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있을 때 데미안이 그를 깨워 자신이 그 안에 언제나 있음을 이야기하고 에바 부인의 키스를 전하며 데미안은 사라진다.

 

이 책은 서문과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문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를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자,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10p.) 이는 <데미안> 전체의 내용을 하나의 문장으로 보아도 무방한데, 이 문장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해해보자면, 이 텍스트의 중요성은 먼저 싱클레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문의 초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살아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10p.) 여기서 데미안이라는 소설의 주제가 밝혀지는데,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자신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갈망, 자신의 의지(will)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과정 속에서 겪는 투쟁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싱클레어는 카인과 아벨적인 구분으로 이루어진 세계, 즉 악한 것과 선한 것의 이분법적인 두 개의 세계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경험 초월적인 진리가 아님을 자신의 경험과 데미안의 도움을 통해 깨닫는다. 데미안이 설파하듯 카인의 표식을 지닌 자를 둘러싼 전통사회의 획일적 이해는 하나의 이야기 거푸집, 언어 게임, 문화산업 상품, 헤게모니,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영적 진리의 세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중요한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죄인중 참회하지 않는 자와 같은 자세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자신의 내면의 의지를 긍정하고 보듬어 자신의 의지가 일궈낸 운명을 사랑해 머지않는 것이라고 데미안은 이야기하고 보여준다. 세계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에 갇혀 있던 싱클레어는 한 마리의 새가 되고 그 새는 힘들게 싸워 알을 깨고 나온다.” 다만 이 과정은 야곱의 싸움처럼 지난하고 고통스럽다.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진정한 내면 속의 바람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 즉 자신 속의 자신과 소통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술에 취해 흥청망청 노는 것, 많은 여성들을 만나며 방탕한 성생활을 즐기는 것, 피스토리우스처럼 과거의 재식에 얽매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혹은 베아트리체와 같은 형상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신적으로 숭배하는 것과 혼동되기 일쑤다. 운명애의 실천은 베아트리체의 형상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아브락사스적인 신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선과 악의 혼재성과 혼종성을 받아들이고 그 사이를 유영하는 자신의 이지를 직관하는 것, 그로 하여금 에바 부인과 같은 사랑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서술자 싱클레어에게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중요하다는 것은, 진정한 운명애의 실천에 다가가기 위한 지난한 과거가 중요하기 때문이며, 운명애를 실천자로서 그가 자기 자신의 의지를 끌어안고 있기에 그 결과로써 자신의 운명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다.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이 텍스트가 중요하다는 것은 또 다른 함의를 지닌다. 이 부분에 대하여 숙고해 보기 위해 헤세가 처음에 이 소설을 발표하였을 때 자신의 이름이 아닌 싱클레어라는 가명을 사용했”(278p.)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가와 서술자의 일치는 소설 속 세계를 허구적 세계에서 현실과 허구 사이를 가로지르는 세계로 전환한다. 싱클레어를 현실 속의 존재자로 치환한 상태로 씀은, 그리고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글을 씀은 싱클레어의 이야기가 그라는 개별자에게만 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닌 역사와 사회 속의 행위자인 당대의 독자와 독자 일반이라는 보다 큰 범주의 존재자들에게 속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한 명의 존재자인 싱클레어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속하기에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운명에 몸을 내던지고 그것을 기꺼이 사랑하고자 하는 실천을 향한 의지와 그에 수반된 고통은 우리 모두의 의지이자 고통이며, 싱클레어를 둘러싼 혼돈스러운 세계는 또한 우리의 세계와 닮아 있다. 여러가지 맥락에서 <데미안>을 관통하는 주제의 시의성은 2024년 현재에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이상한 작가 데이비드 실즈의 이상한 단편 영화 <Melville to Bannon: How We Got Here (Truth Isn’t Truth)> 1851년부터 현재까지의 인문자연과학 발전사를 훑어가며 사실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전유되었는지 되묻는다. 이 이상한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 사실이 되어버려서 골 때리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허구와 사실이 혼재된 이 세상에서 나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데미안>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운명애가 일종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으로는 먼저 싱클레어의 아버지가 그의 젖은 신발을 나무라는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크로머에게 책잡힌 싱클레어는 자신으로부터 선과 악의 구분이 무너져가는 것을 실감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불고 모든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음을 알지만 동시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31p.)고 자신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31p.) 선의 세계에서 벗어나 악인의 세계에 영구히 머무를지도 모르는 이 중요한 순간에 그의 아버지는 그의 젖은 신발을 나무란다. 이 경험은 그에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그는 아버지의 나무람을 자신의 죄와 연결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죄의식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하여금, 그는 무겁고 두렵게 느껴졌을 죄라는 것, 또는 악으로 여겨지는 것들의 가벼움을 실감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한 순간 아버지의 무지에 일종의 경멸감을 느끼는데, 그는 이 경멸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젖은 장화에 대고 하시는 아버지의 질책은 내겐 자잘한 것으로 보였다.” 마치 견고한 기둥처럼 자신의 유년시절을 받들고 있었고 선과 악의 규준으로 믿어지던 아버지의 나무람이 이제는 너무나 하찮은, 핵심을 벗어난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로 하여금 그는 데미안의 조언에 시간적으로 앞서 선과 악의 자의적 구분과 그것의 덧없음을 체감하는데, 이로 하여금 독자인 나 또한 내 자신의 경험에서 나라는 인격체의 근간이 되어주었던 부모의 규범과 규율에서 벗어나던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 규율의 세계가 거시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작고 하찮은 것이었는지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의 그림 아래 노발리스를 인용하며 운명과 마음은 하나의 개념에 대한 두 이름이다”(135p.)라고 적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앞서 싱클레어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닌 자기 자신의 그림인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은 그 자신의 물질적인 외양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속한 어떤 것의 일부라는 의미서 자기 자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그림은 싱클레어의 안의 마음일 것이며 노발리스에 따라 그의 마음의 실재적 형상이자 운명의 실재적 형상일 것이다. 그러한 연장에서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마주하며 그녀가 자신 안에 속한 것이며 자신의 운명임을 인지하고 데미안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다. 이러한 이해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살폈기에 가능해진다. 이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싱클레어와 같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함으로써 마음과 운명의 일치로 나아가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현대 사회를 지속적인 주의력 분산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시각적 자극들이 넘쳐난다. 기 드보르의 말을 빌리자면 스펙터클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예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합일되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집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흩어졌던 것들을 회집하고 재조직하는 경험,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과정 속에서 그림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져 합일 상태에 이르는 싱클레어의 경험은 지속적인 집중력의 분산 속에서 귀중한 경험이자, 니체적인 운명애로 나아가는 실천의 방법으로써 중요성을 갖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싱클레어가 크나우어가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부터 막아낸 장면을 꼽고 싶다. 소설 속 피스토리우스, 데미안, 에바 부인은 모두 그를 이끄는 지도자로써 싱클레어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크나우어는 다르다. 크나우어와 싱클레어의 관계는 마치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를 뒤집어 놓은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싱클레어가 크나우어의 구도자로써 그를 구해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사건 이후 피스토리우스와 싱클레어의 관계 또한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크나우어가 순진하게 순결에 집착하던 것과 같이 피스토리우스는 케케묵은 것들 것 사로잡혀 자기 자신의 운명에 온전히 투항하지 않는 사람으로 싱클레어에게 인식되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돌아보며 싱클레어는 그는 나를 어떤 길로 이끌었으나 그건 그를, 인도자를 뛰어넘고 떠나야 하는 길이었다”(199p.)고 회상한다. 이로부터 독자는 싱클레어가 얼마나 성장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한 때 싱클레어의 구도자 중 하나였던 피스토리우스의 한계를 발견함으로써 운명애의 추구의 어려움에 관하여 숙고하게 된다. 삶을 바쳐 선과 악의 혼종상태로 존재하는 신인 아브락사스를 추적하고 그를 따르는 삶 속에서도 외부적인 것, 아브락사스의 존재론적 함의에 메달림으로써 자신에 내면에 투항하지 못하고 메달리는 한계에 부딪힐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