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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들 정리

젊은 베르터의 고통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정현규 역, 을유문화사, 2010)

 <젊은 베르터의 고통> 1774년에 발표된 괴테의 장편소설로 청년 베르터가 사랑으로 인한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서간체와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혼용하여 풀어낸다. 먼저 서간체로 작성된 1부는 전부 베르터가 친구인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5 4일에서 5 30일까지의 편지에서 베르터는 고향을 떠나 정착한 지역에서 적응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 편 베르터라는 인물에 대한 여러가지 인상을 만든다. 예컨대 아이들을 놀아주고 선의를 베푸는 행동은 그의 선한 성품을 드러내는 한편, 자신을 거느리는 과부에게 사랑을 느끼는 농부의 이야기에 도취된 베르터의 모습을 통해 순애보와 같은 사랑을 추구하는 베르터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6 16일의 편지에서 베르터는 알베르트와 혼인이 예정되어 있는 로테를 만나 춤을 추게 되고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이후 그녀와 여러 번 교류를 하던 베르터는 로테에게 더욱 빠져든다. 7 26일까지의 편지에서 베르터는 로테의 작은 말과 손길에도 크게 감동하며 그녀에게 완전히 도취된 모습을 보여준다. 7 30일의 편지에서 베르터는 알베르트가 돌아왔음을 빌헬름에게 알리며, 그가 누구나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는 모범적이며 사랑스러운 사람”(65p.)이라고 소개한다. 베르터는 알베르트에 대한 찬사를 통해 로테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비참함과 슬픔을 드러낸다. 나아가 8 8일의 편지에서는 자신이 떠나야 함을 암시한다. 8 12일 편지에서 베르터는 알베르트와 말다툼을 하게 된 경위를 풀어놓는다. 둘은 자살의 도덕에 관하여 의논하는데 알베르트는 자살이 무책임하고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한편, 베르터는 삶을 초과하는 고통으로 인해 자살하는 이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마치 질병에 걸린 것과 다름없다는 입장을 비춘다. 이후 편지에서 베르터는 자신이 그 열병에 걸렸음을 인정하고 로테와 알베르트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그 지역을 떠난다.

 

2부는 베르터가 빌헬름을 비롯하여 로테, 알베르트에게 보낸 편지와 3인칭으로 서술된 편집자 노트가 함께 실려 있다. 로테를 떠나 공사 아래에서 업무를 시작한 베르터는 공사와 완만한 관계를 발달시키지 못한다. 12 24일 편지에 그는 공사가 세상에 있을 법한 가장 꼼꼼한 바보”(99p.)라고 이야기하며 그에 대한 불만을 품는다. 일례로 공사가 베르터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C백작에 대하여 학식이 부족”(101p.)하다고 비난한 것에 대하여 베르터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신분에 의존한 명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1 20일에 베르터는 로테에게 편지를 쓴다. 이 글에서 베르터는 로테 없는 삶의 공허함을 이야기하는 한편, B양과의 관계 또한 언급한다. 2 20일 알베르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로테와 그가 혼인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베르터는 로테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못한다. 3 15일의 편지에서 베르터는 새로 정착한 고장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된 경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평소 친하던 C백작의 만찬에 갔지만, 그 자리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베르터가 갈 자리가 아니었고, 결국 C백작은 그를 불러 자리를 떠날 것을 부탁한다. 이 자리에서 베르터는 그가 그 자리에 있음을 불편하게 여겼던 사람들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며 3 16일 편지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환멸을 느끼고 있으며 이런 삶을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베르터는 결국 그 고장을 떠나 병사가 되어 전쟁에 참여할 마음도 먹었으나 그 중간에 함께 시간을 보낸 후작에게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결국 로테의 곁으로 다시 향한다. 비록 베르터는 로테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안정을 얻지 못한다. 로테와 알베르트의 관계로 인하여 그는 더욱 큰 고통을 느낀다. 9 4일 편지에서 베르터는 일전에 만났던 농부(과부를 사랑한 하인)와 다시 만났음을 이야기하며 농부가 자신의 사랑을 표했다가 일자리를 잃게 되었음을 전한다. 동시에 베르터는 농부에게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은 그럴 용기조차 낼 수 없음에 한탄한다. 이러한 고통은 계속되어 10 26일 편지에서 베르터는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이 얼마나 기억될 수 있을지 가늠한다. 로테와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답답함이 가중되는 와중 베르터는 로테를 흠모했다가 정신병에 걸린 로테 아버지의 서기관을 우연히 만나 깊은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베르터는 비참함을 느끼며 점점 예민해진다. 2부의 편집자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는 베르터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들이 담겨 있다. 비록 알베르트의 친구들은 그가 전혀 변한 구석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베르터는 로테에 대한 알베르트의 애정이 변했다고 확신했음도 밝혀진다. 나아가 과부를 사랑했던 농부가 자신을 대체한 하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베르터는 그를 격렬히 옹호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알베르트는 로테에게 베르터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한다. 알베르트의 요구를 받은 로테의 변화와 내면의 고통으로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피어났음을 편집자는 밝힌다. 결국 12 20, 로테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까지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베르터는 로테에게 거절당하자 자살을 결정한다. 그는 준비를 마치고 로테를 찾아가 마지막으로 오시안의 시를 읽은 뒤 알베르트의 총으로 자살한다.

 

 <젊은 베르터의 고통>은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괴테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글을 쓴다는 것은, 더군다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경험을 있는 그대로 쓰는 실재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글을 쓰는 순간 작가 자신은 지워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순간 그것은 글로 남고 실재는 휘발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언제나 불충분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초과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고 글쓰기는 언제나 실재적 재현에 실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글쓰기는 동시에 작가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백지에서 시작하는 글쓰기는 그 중 으뜸은 문학 혹은 실험적 글쓰기일 것인데 이것에는 어떠한 종류의 지침서도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작가가 무언가를 선택하기를 강요하는 지난한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나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다음 단계는 무엇일지 선택해야 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자신을 지워 버린 글 속에 푸코가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저자-기능을 남긴다. 다시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언제나 자기 자신(저자-기능)이 되면서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것(작가의 죽음)을 새기는 기묘한 경험이다.

 

가슴 속 뜨거움이 모두 연소되어 남은 것은 잿더미 뿐인 괴테가 베르터의 입을 펜을 빌려 자신을 경험을 재조합하고 꾸며내는 방식으로 되찾고자 함은 혹은 자신을 잃고자 함은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한 방식으로 괴테는 소진(exhaust)되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럼에도 사랑의 경험이 남기고 간 흔적이 무엇인지 발굴할 수 있음과 동시에 수놓아진 자신의 글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말로도 그의 전 존재와 그가 하는 표현에 깃들어 있는 다정함을 표현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 내가 재현할 수 있는 것이래여 모두 서툰 것에 지나지 않아.”(29p.)라는 베르터의 글처럼 괴테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글쓰기의 과정을 통해 구원을 청하고 있다. 동시에 괴테의 처절한 몸부림을 텍스트의 형태로 읽고 있는 나는, 그로 하여금 독자로 탄생하여 베르터가 과부를 사랑했던 농부에게 느꼈던, 로테 아버지의 서기관으로부터 느꼈던 그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괴테가 남겨둔 저자-기능 속에서 애처로운 사랑의 흔적을 응시하고 그 순진함과 뜨거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괴테(저자-기능으로서의 괴테, 이하 괴테는 모두 이 저자-기능으로서의 괴테를 뜻함)의 고통은 그 형식에도 녹아들어가 있는 듯싶다. 형식은 있었다 사라지고 다시 생겨난다. 처음에는 빌헬름에게 전하는 일방적인 편지의 모음이었던 것이 2부에 들어서 그 대상이 로테가 되었다가 알베르트가 되고 종국에는 편집자가 개입하여 사건의 끝을 보여주는 이러한 구성은 괴테의 혼란한 내면을 반영한 듯 보인다. 동시에 이런 서술의 확장은 개인적인 내면에서 초점이 보다 사회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마지막 3인칭으로 쓰인 편집자가 독자에게 드리는 글로 하여금 글의 방향은 소설 속의 허구적인 누군가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소설 밖 우리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는 독자인 <젊은 베르터의 고통>의 연장으로 존재하게 되고 소설 속에서 베르터의 글을 읽는 최후의 독자로 남게 되며 베르터의 고통/고뇌와 무관하지 않은, 소설 속에서 호명된 하나의 존재로서 베르터의 고통을 내면화 한다. 소설 안에 머무르던 개인적 고통이 소설 밖으로 전이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고 독자 안에 현현하게 되는 이 순간, 베르터의 고통은 더 이상 베르터의 것만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헐렁해 보이고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괴테의 구성은 되려 독자 텍스트 안에 생생하게 현존하게 한다. 동시에 본문 밖에 위치한 텍스트인 각주 또한 비슷한 기능을 갖는데 발하임 - 독자 여러분은 여기에 언급된 지명들을 찾으려는 수고를 하지 말기 바랍니다. 원래의 지명들은 필요에 의해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205p.)를 비롯한 모든 각주는 이 텍스트 전체가 독자를 향한 글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독자를 호명함으로써 독자라는 문을 열어젖히고 텍스트 안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 아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나는 이것을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는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본문 이전에 배치된 프롤로그이다. 프롤로그에서 편집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인물은 이런 말을 건넨다. “여러분은 그의 정신과 성격에 경탄과 사랑을, 그의 운명에는 눈물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 그리고 그대가 상황 때문에, 혹은 자신의 실수로 친한 친구를 발견할 수 없다면 이 조그만 책을 그대의 친구로 삼도록 하십시오.”(7p.) 본문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독자는 자신의 존재로 하여금 이 텍스트가 생동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한편, 기꺼이 독자의 친구가 되어주고자 하는 이 텍스트 앞에서 그는 무장을 해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장치 덕에 독자는 자칫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는 베르터의 사랑에 기꺼이 공감할 수 있게 되고 나 또한 이 친절한 호의를 보며 본문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베르터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었다.

 

<젊은 베르터의 슬픔>에서 인상깊었던 또하나의 장면으로는 1771 8 12일 편지에서 베르터와 알베르트가 자살의 도덕적 속성에 관해 논의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트는 베르터에게 자살은 일종의 나약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74p.)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계몽주의의 발전 과정 중 발달한 합리주의 전통, 그리고 루터로부터 시작된 청교도적 가치관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사회적 정당성의에 귀속된 가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베르터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표명한다. “나는 치명적인 열병으로 죽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치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75-76p.) 여기서 독자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의 기저에 놓여 있는 원천적인 갈등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커지는 고통의 무게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존재론적 가치의 상실이다. 고약한 열병으로 고통받는 이가 죽을 수 있듯, 인간의 내면 또한 엄청난 고통의 풍파에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기존에 없던 이러한 가치체계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합리성의 세계안으로 편입시키는 것, 그것이 편집자, ‘베르터, 혹은 괴테가 이 이야기를 풀어낸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베르터가 로테에게 오시안의 노래를 읽어주는 부분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고 싶다. “왜 너는 나를 깨우는가, 봄바람이여? 너는 애교를 떨며 너는 천상의 이슬방울로 적시노라!’라고 말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시들 때가 가까워졌고, 내 잎사귀를 떨어뜨릴 폭풍우도 가까이 있구나!”(187p.) 하는 베르터의 낭독은 베르터의 불운한 운명을 로테에게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한편, 독자에게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베르터의 감정을 전유하도록 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 장면은 로테와 베르터 사이의 외부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여 해소/결말에 도달하기 앞둔 시점의 장면인데, 이 과정에서 괴테가 서사시의 상징언어를 통해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을 풀어낸다는 점은 베르터의 자살을, 비합리적인 어떤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변환하는 방식으로 알베르트로 대변되는 기존의 합리성 구조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기능 또한 수행한다. 자살에 대한 괴테의 사유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루마니아 출신의 실존주의자 에밀 시오랑을 떠올리게 하는데, 자살을 원죄의 성격이 아닌 실존적 문제와 관련된 숙고 속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보는 그의 철학과 괴테의 사유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비록 <젊은 베르터의 고통>에서 괴테가 전개하는 사유와 시오랑의 철학적 사유의 맥락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자살에 대한 사유의 전회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두 인물은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