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명하자면…
말 하는 나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아니, 가끔이라고 하면 거짓말이야. 사실 가끔이 아니고 종종 하지. 어쩌면 줄곧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생각을? 말을 하다 보면 어딘지 진심이랑 항상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말이야. 음… 그럴 때가 있지. 그래서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글쟁이들의 글을 많이 본 것 같아. 그렇다고 또 구구절절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 또 오그라들어.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좋아하는 사람들, 싫어하는 사람들, 아무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사람들,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기분이 들어.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려고? 그걸 모르겠어. 어떻게 할 방법이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네. 그런데 오해가 맞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나도 너를 잘 모르는데 사실 나는 나도 잘 모르거든.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있어. 똑같이 참새가 바라보는 내가 있고, 무심코 던졌던 야구공과 접촉한 내가 있고, 텍스트를 읽은 내가 있는가 하면 텍스트가 바꾼 내가 있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줄곧 그 생각을 붙잡고 있으면 또 이런 생각이 찾아와. 나는 언제나 무수히 존재하고, 무수한 나는 언제나 무한히 어긋난 상태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오.. 멋진 생각이네. 어쩌면 내 말과 진심이 어긋난 게 아니라 나와 내가 어긋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 근데, 넌 참 말을 잘 한다. 네 말을 듣고 있으니 어쩐지 너와 내가 합동을 이루게 되는 느낌이야. 사실 나는 말을 하고 있지 않아. 그럼 무얼 하는 거야? 나는 사라지고 있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야? 나는 너로 하여금 소멸하고 있어, 이미 소멸한 것일지도 모르지. 중요한 건 사라졌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사라지면서 너와 내가 생겨나고 있어. 그렇구나. 그럼 나도 사라지겠다. 그렇지? 맞아. 네 덕에 너와 내가 생겨나고 있어!
과제를 하기 싫었던 학생이 과제를 즐기기 위해 과제를 모욕하다 – 누군가의 진로심리학 과제에서 발췌
(…). 그래서 검사 결과를 보고서도 나는 이 결과들이 어떤 통찰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되려 나는 이 검사 자체를 회의한다. 특히 진로개발준비도와 같은 검사는 마치 “너는 진로를 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취직을 준비를 한다는 놈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몰라도 되겠어? 진로개발준비도가 낮으면 너는 뒤떨어진 패배자가 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반격하지 않을 수 없다. “진로는 정하는 것인가? 진로를 정하지 못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네트워킹을 통해 진로에 대한 추가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공정한가? 그냥 흘러가는 삶을 살면 안되는 것인가? 에밀 시오랑 선생은 그저 진로에 대한 지식도 없이 허구한 날 자살이나 생각하는 우울증 환자에 불과했을까?”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재로 심하다.) 하지만 벌어진 이 틈을 채우는 것은 아마도 이 글의 목적에 맞지 않을 것이다. 각설하고 내 진로검사 결과나 뜯어보자. (학생이라는 신분을 얻고서 수많은 수업에서 과제와 토론을 하고 있지만 나는 나를 해명할 기회가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해명하기를 저버린다. 대신 나는 나이기를 거부하고 수업의 방향에 맞춰 나를 구부린다.)
직업가치관 검사와 진로개발준비도 검사를 실시하였다. 직업 가치관 검사 결과 먼저 보자면 나는 창의성과 자율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보수와 안정성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주 정확한 진단이다. 나는 우선 이상한 짓거리를 하며 살아가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갖는데, 예컨대 조르주 페렉처럼 공원에 앉아서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그저 보이는 것에 대한 장황한 글(“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는 제목부터 의미심장 그 자체이다.)을 쓰거나 알랜 긴스버그처럼 히피 복장을 하고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분노에 가득 찬 시(“America”라는 시에서 긴스버그는 “go fuck yourself with your atomic bomb”라고 울부짖는다)를 쓰거나 피터 한트케처럼 처음으로 끝까지 관객을 모독하는 극(“관객모독”)을 쓰고 싶기도 하다. 아마 이런 것은 창의성과 자율성이라는 단어와 아주 잘 들어맞는 특징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게 왜 흘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건 엄청나게 모호하면서도 아득한 그늘
속에 드리운 심연과 같은 것으로 생각이
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나는 언제나 나에
대해서 계속해서 변명하고
해명하고 설명하고 해설하고 번역하고 알려주고
하려는데 말하다 보면 이따위 말이
말이 되나 싶어서 다시
그게 아니라고 계속해서 변명하고
해명하고 설명하고 해설하고 번역하고 알려주다
보면 이런 말 따윈 정말 말 같지도 않구나
싶어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후회하고 착각하다가
입을 앙다물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영영
오해받을 것 같아서 여기까지
- 여기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
흘러온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