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 미하엘 엔데 (한미희 역, 비룡소, 1999)
<모모>는 1973년 출판된 미하엘 엔데의 동화소설로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다. 1부 “모모와 친구들”은 모모와 친구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살던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묘사한다. 1장에서 독자는 모모의 세계로 초대된다. 리기도 하고 언제나 있었던 것도 같은 소녀 모모가 발견되자 주민들은 그녀의 의사를 묻고 그녀와 함께 생활하기를 택한다. 주민들은 그녀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모모는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모모는 자신의 시간을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이 자신 내면에 속하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끔 돕는다. 2장에서 모모는 미장이 니콜라와 술집 주인 니노의 갈등 사이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중재자가 되어준다. 3장에서 모모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놀이에 갈등이 끼어들 틈을 메꾸어 준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탐사선 “아르고”호를 타고서 거친 파도를 가르고 나아갈 수 있 다. 4장과 5장에서는 모모가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도로청소부 베포와 관광 안내원 기기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시간을 들여 경청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시간에 깊이를 더해주는 모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2부 “회색 신사들”에서는 이 회색 신사로 하여금 모모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6장에서처럼 “똑 떨어지는” 계산을 통해 시간을 절약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고 낭비하지 않도록 만든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가속화된 시간 속을 살아가게 되는데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은 곧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을 해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7장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모모와 기기, 그리고 베포를 찾아오지 않기 시작한다. 오로지 아이들이 모모를 찾아와 상상의 나래를 펼칠 뿐이다. 모모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직접 그 이유를 찾아 나서지만, 바쁜 미장이 니콜라는 모모에게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술집 주인 니노 또한 바쁜 삶을 살며 지친 모습이었지만 결국 모모를 찾아와 자신의 과오를 성찰한다. 그러던 모모는 한 인형을 발견하고 꾸준히 자신에게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인형에게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을 느끼던 와중 회색 신사가 그를 찾아온다. 회색 신사는 모모가 시간을 아끼도록 설득하지만 모모는 굴하지 않았고, 회색 신사는 자신들이 알려지면 안된다는 비밀을 누설하게 된다. 이후 8장에서 모모, 베포, 기기, 그리고 아이들은 이 회색 신사들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투쟁을 준비하지만 9장에서 초대받은 어른들이 모두 너무 바빠 투쟁에 참여하지 못한다. 기기와 베포, 그리고 모모는 매우 실망한다. 이 집회로 회색 신사들에게 추적을 당하는 모모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를 따라 언제나 없는 거리에 있는 호라 박사의 아무 데도 없는 집에 도착한다. 모모를 놓친 회색 신사들은 10장에서 모모를 친구들로부터 떼어낸다. 그 사이 12장에서 모모는 호라 박사의 집에서 시간의 근원지를 보고 회색 신사들의 실체를 알게 된다.
3부 “시간의 꽃”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모모는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회색 신사들이 친구들을 바쁘게 만들어 둔 것을 모른 체 방치되어 있던 기기의 편지를 읽고 카시오페이아와 함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14장에서 니노의 식당을 찾아간 모모는 너무 바쁜 니노와 바쁜 니노의 손님들 때문에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15장에서 만난 기기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렵게 만난 기기였지만 결국 모모는 기기를 데리고 원형극장으로 돌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16장에서 모모는 베포를 찾아 나서지만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고 아이들 또한 모모를 따라 원형극장으로 돌아가 놀지 못한다. 회색 신사들은 이제 모모를 체념하도록 만들기위해 모모와 자정에 만나기로 약속한다. 17장에서 모모는 친구들을 구해내기 위해 회색 신사들과 대면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들을 마주하지만 엄청난 수의 회색 신사들에게 주눅든다. 호라 박사의 집을 알려달라는 요구에 모모는 카시오페이아만 그 길을 안다고 이야기하고 회색 신사들은 카시오페이아를 찾아 떠난다. 18장에서 모모는 카시오페이아와 재회해 호라 박사의 집을 찾지만 그들 뒤를 회색 신사들이 쫓고 있었다. 회색 신사들에게 포위되어 시간을 나눠주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19장에서 모모는 영웅을 자처한다. 그리하여 호라 박사는 모모의 시간 만을 흐르게 하고 다른 모든 시간을 멈춘다. 20장에서 모모는 멈춘 시간을 틈타 카시오페이아와 함께 회색 신사들을 역추적한다. 멈춘 시간 속에서 회색 신사들은 시간을 훔칠 수 없기에 시간의 꽃으로 만든 시가가 숨겨진 곳에 가기 위해 다툰다. 그 과정에서 시가를 떨어뜨린 대부분의 회색 신사들이 사라지고 21장에서는 자멸하기에 이른다. 결국 훔쳐졌던 시간은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오고 사람들은 다시 모모의 평안한 세계를 살게 된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모모를 읽고 재미없어 책을 내려두었던 경험이 있다. 중학생 때의 내 삶을 –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어디든 돌아다니던 그 파란만장한 시절을 – 고려했을 때 왜 이 책이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졌는지 알 것만 같기도 하다. 중학생 때까지 모모와 같은 상상의 세계, 늘어진 시간의 세계를 나만의 보폭으로 걸어가고 있었기에 필독서들을 읽으며 모든 것들이 빠르고 바쁘게 느껴지는 현대사회에 대한 엔데의 날카로운 비판이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른 것 같다. 대학 생활은 나름대로 배워가는 것들이 있고 보람차지만 동시에 힘겹다. 과제와 발표, 정해진 내용의 학습에 몰두하다 보면 나는 내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것인지 공부를 위해 내 자신을 굴리는 것인지 알기 힘들다. 바쁠 때면 무엇에도 신경을 쓰고 싶지가 않고 좋아하는 시, 소설, 영화를 볼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나를, 하지 않으면 근질거렸던 운동마저 하기 귀찮아진, 진정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무엇도 써내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즐겁지 않은 소진된 내 자신을 발견하면 서글픈 마음이 들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모를 다시 읽으니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모모>는 시종일관 독자에게 같은 메시지를 던져 주는데 다음의 인용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23p.) 이 단순한 말 속에서 우리는 아득하게 느껴지던 많은 문제들의 간단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간을 들여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고민을 나누고 상상하는 것, 문제 앞에서 당사자인 우리들이 마주앉아 어린이의 열린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모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시간을 나눠주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회색 신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그리고 사회가 분화됨에 따라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람시와 루카치는 마르크스의 논의에서 나아가 노동자들이 착취되고 있음이 자명함에도 사회변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을 이데올로기적 지배관계에서 찾는다. 우리는 마치 이 세계의 부품이 되어버려 우리 자신의 행동이 정말로 어떠한 목적을 갖고 영향을 낳는지 모른 채로 살아간다. 어떤 나이가 되면 공부를 하고 어떤 나이가 되면 취직을 하고 어떤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고 어떤 나이가 되면 애를 낳고 등등… 많은 것들 것 결정된 채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것을 위해 힘쓴다. 이를 테면 국가의 안위를 위해, 미래 세대를 위해, 천국에 가기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 우리의 일이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감각은 없다. 그저 열심히 하면 그렇게 되겠지 생각할 뿐이다. 프랑스 예술가 기 드보르는 이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인 스펙타클들이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이야기한다. 거대한 고층 빌딩들,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멋진 자동차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갈망하게 만든다. 소망은 더 이상 우리가 생산하는 그것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행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전혀 다른 곳, 소비를 향하게 된다. 현대 사회, 특히 서울에는 회색 신사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아름다운 건물과 높은 건물들, 우아한 옷, 기술이 집약된 컴퓨터들은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왜 이 험난하고 지난한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이 일에서 내가 갖는 중요성은 무엇인지 잊도록 만든다. 이제 우리 눈은 쉴 세가 없이 스펙타클에서 스펙타클로 옮겨 가고 그 속에서 주목경제가 창궐하여 한정된 시간 속에 단편적인 경험들이 밀도 높게 층층이 쌓인 가속화된 시간 속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모>는 우리가 꼭 그런 시간 속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드 세르토가 <일상의 발명>에서 이야기하듯 모모는 물론 기기와 베포, 그리고 어린 아이들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생각들과 지배관계를 적극적으로 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유롭게 피해 다니며 자신만의 전략을 펼치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 주변에 만연한 것들을 보고 엉뚱한 상상으로 물들여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경청한다. 나무의 숨소리와 회사원의 한숨 참새의 노랫소리와 어린이의 동요를 편견없이 들어준다. 그리하여 모모들은 백과사전처럼 단편적으로 나열된 개별적 경험들이 아닌, 한정된 시간 속에 들어선 층층의 경험이 아닌, 하나의 장편소설처럼 길게 늘어진, 깊이감을 갖는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 삶 속에서 모모들은 음악가, 시인, 소설가, 화가, 사진가, 혹은 친구와 애인이라는 명칭으로 다가와 경험에서 멀어지는 우리의 목덜미를 붙잡고 우리의 생각을 묻는다. 그러면 다시금 경험들을 되짚다가 깨닫는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모모>를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 또한 이와 관련된 장면들이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원형극장에 모여 해양 탐사 모험을 떠나는 놀이를 한 장면을 통해서 엔데는 엉뚱한 상상들이 모여 선사하는 즐거움과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경험의 깊이를 보여준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는 날, 아이들은 지루함을 느끼다 곧 원형극장을 아르고 호라고 이름 붙이고 영원한 태풍을 물리치기 위한 모험에 떠난다. 이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발생하지만 배에 탑승한 인원들이 모두 협력해 나아가며 다가온 위험들을 물리치고 아르고 호는 성공적으로 모험을 마치게 된다. 여기서 아이들은 지루함이라는 일상적인 경험, 스쳐 지나가도 괜찮은, 파편적인 경험에서 보다 다층적인 감정이 들어있는 흥미로운 어떤 것으로 확장하고 그 안에서 모험을 상상함으로써 협력의 중요성과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경험들 속에서 생겨나는 지혜의 힘을 확인한다. 이로써 상상의 차원에 머물던 이 놀이 경험은 단순히 상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들이 움직이고 논의하며 나아가기 때문에 현실과도 연결된다. 아르고 호를 “타고 있는 동안에 천둥 번개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47p.) 놀이의 결과를 못내 아쉬워하며 “슘 슘 구미라스티쿰을 그냥 가라앉혀 버린 건 정말 유감이야. 그 종류 중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표본이었는데”(47p.)라며 후회한다는 것은, 이 상상이 아이들에게 있어 실제적인 사건으로 남아 아이들 내면에 깊은 감각으로 자리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회색 신사들을 피해 호라 박사의 집에 도착한 모모가 호라 박사와 대화하는 장면 또한 시간이 우리에게 남을 수 있는 여러 방법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준다.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217p.) 라는 호라 박사의 일침은 모모를 향한 것이지만, 독자인 우리에게 또한 날카롭게 다가온다. 시간을 사용하는데 있어 우리는 가슴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놀이처럼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풍부한 것으로 자리잡아 오래도록 기억되는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현실적인 일들에 천착하여 그로부터 어떤 기억도 없이 시간을 연소해 버리고 있는지 자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호라 박사는 다시금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217p.)하다고, 그건 무척이나 슬픈 일이라고.
마지막으로 회색 신사들이 자멸하는 장면은 어쩌면 회색 신사들(소설 속 뿐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그들)의 본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모와 호라 박사의 계획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회색 신사들은 한정된 양의 시가를 피우기 위하여 서로 싸운다. 이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을 도모하는 아이들의 모습과는 다른데, 이 회색 신사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회색 신사가 두 명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들은 협동하여 손쉽게 모모로부터 간의 꽃을 빼앗지 않고 “그 꽃 이리 내놔!”(356p.)라고 성급하게 외치다 입에 물린 시가를 스스로 뱉는다. 현대사회의 회색 신사들 또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골드하버는 주목경제의 시대를 진단하며 정보의 흐름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주목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주목을 받아야 우리의 주머니로부터 돈을 뜯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 보다 주목을 받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돈과 시간을 앗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어쩌면 이 회색 신사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변의 모모들에게 주목하는 것, 그로부터 가속화된 시간이 아닌 축 늘어진 세계에 몸을 담가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회색 신사들은 마지막 남은 주목을 위해 싸우다 그저 무너져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