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것들 정리

에밀리아 갈로티 -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윤도중 역, 지만지, 2014)

Raphael Na 2024. 7. 8. 14:35

<에밀리아 갈로티>는 봉건주의 사회의 비이성적인 면모를 폭로하는 시민비극이다. 1막에서 영주는 정부인 오르시나 백작부인의 편지에는 관심을 주지 않고 에밀리아의 그림에 감탄하며 한 때 사랑을 느꼈던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이성을 잃는다(‘카밀로 로타가 가져 온 사형집행서를 확인하지 않고 서명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비이성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2막이 시작되고 영주는 결혼을 앞두고 기도하러 교회를 찾아간 에밀리아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만 이는 수포로 돌아가고 결혼을 미루기 위한 마리넬리의 계략마저 실패로 돌아간다. 3막에서 마리넬리안젤로를 통해 아피아니 백작을 살해하고 에밀리아를 납치하여 영주의 성안으로 데리고 온다. 4막에서 영주마리넬리의 계략에 치를 떨지만 아침에 에밀리아를 찾아가서 계획이 틀어졌지만 이는 사랑을 잡을 기회라는 마리넬리의 입놀림에 넘어간다. 한편, 4막과 5막에서 클라우디아오르시나 백작부인’, 그리고 오도아르도는 각각의 정보를 통해 아피아니 백작의 죽음과 에밀리아가 겪는 슬픔의 책임이 마리넬리영주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오도아르도오르시나 백작부인에게 단도를 받아 영주를 마주하고 에밀리아에게 사건의 전말을 풀어주자 그녀는 오르시나 백작부인의 칼로 자신을 찌르려 한다. ‘오도아르도는 그녀를 말리다가 에밀리아의 말에 감동하여 그녀를 직접 칼로 찔러 죽인다. ‘에밀리아의 죽음으로 하여금 이성을 따르는 오도아르도에밀리아의 복수는 성공하고 목적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마리넬리와 부하를 잘못 두고 이성에 근거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영주의 계획은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비록 <에밀리아 갈로티>가 나의 개인적인 취미와는 거리가 멀고, 계몽주의적 교훈을 담은 작품에는 관심이 없지만 칸트 철학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할리우드의 플롯을 연상시키는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에밀리아 갈로티>는 나름대로 인상적인 희곡이라고 생각한다. 1막에서 영주와 화가 콘티가 대화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인데, 이곳에서 우리는 1790년에 출간된 <판단력 비판>에서 시작된 현대 예술 철학의 모티프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술을 조형자로서 자연이, 그런 것이 있다면 말씀입니다만, 구상한 대로 형상을 그려야 합니다. 그리기 어려운 소재로 인한 한계와 상황에 따라 큰 훼손 없이 말입니다.”(13p.)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상실된 게 무엇이고, 그게 어떻게 상실되었으며, 어째서 상실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안다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낍니다.”(17p.)는 콘티의 대사는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숭고와 예술의 미적 특성 사이의 관계와 미메시스를 규명하고자 했던 칸트의 작업을 연상시키고 이성에 근거한 판단으로 하여금 복수에 성공하는 에밀리아오도아르도의 최후는 합목적성을 강조한 칸트의 정언명령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예술작품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형성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에밀리아 갈로티>는 기존 계몽주의적 논의를 발전시키는 한편, 콘티의 입으로 발화되는 대사로 하여금 현대 미학적 사고의 단초를 마련하고 있으며 시민비극적 플롯을 통해 인간이성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에밀리아 갈로티>가 인상적인 희곡인 가장 큰 이유는 단연코 그 플롯에 있을 것이다. <에밀리아 갈로티>의 플롯은 현재의 플롯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플롯을 중점적으로 다룬 영화 시나리오 작법서이자 현재까지 시나리오 작법정전으로 평가받는 로버트 맥키의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제시되는 원칙들이 적용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장 중요한 마지막 막에서 오도아르도의 독백을 통해 표현되는 분노와 이성을 통해 이를 가리려는 시도는 그의 내면에 속한 무의식적인 욕망(폭력)’의식적인 욕망(딸의 안녕)’사이의 내면적 갈등을 드러내는 한편 그의 내적 갈등은 영주마리넬리와의 개인적 갈등에서 시작된 도발적인 사건(‘아피아니 백작의 죽음과 딸의 납치)’과 결합하여 그 복잡한 양상을 형성하고 에밀리아의 자살 기도는 오도아르도예상결과간극을 형성하여 종국에는 자신의 딸을 직접 살해하는 결말로 이어진다. 따라서 인과성을 벗어난 것으로, 혹은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오도아르도의 행동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영주를 초점자로 진행되는 극의 전반부에서도 영주기대와 그에 따른 행동’,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결과사이의 간극이 점진적으로 벌어지며 극의 긴장감이 더해진다. 이로 하여금 독자 및 청중은 극의 사건에 점차 몰입하게 된다. 따라서 <에밀리아 갈로티>의 플롯 구조는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즐거운 독서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할리우드적인 플롯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로 하여금 독자와 청중을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아 갈로티> 2024년에 읽어도 여전히 좋은 작품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 것이다. 여성을 주체적이지 못한 인물로 바라보는 영주오도아르도의 대사들도 <에밀리아 갈로티>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이유 중 하나지만, 아마도 가장 강력한 비판은 <에밀리아 갈로티>에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계몽의 역설이 아닐까 싶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기된 계몽의 역설은 계몽주의적 교훈이 강조됨으로 하여금 기존 봉건주의적 체계, 혹은 종교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나 계몽주의적 합리성이 낳은 지식들에 다시 한번 개인이 억압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밀리아 갈로티>에서 오도아르도에밀리아를 수녀원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지만 마리넬리가 법적, 행정적 문제로 이를 가로막자 이내 포기한다. 나아가 에밀리아를 죽인 후 오도아르도여기 내 범행의 피 묻은 증거가 있소. 내 발로 감옥에 들어가겠소.”(171p.)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선언은 사회계약론에 근거한 시민의 도덕성을 따르는 것으로 보임과 동시에 플롯의 강력한 구조로 하여금 이러한 판단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하지만 오도아르도는 자신의 대사를 통해 이야기하듯 영주근시안적인 폭군’(153p.)이며 하고싶은 짓은 다’(153p.) 하는 자다. 동시에 오도아르도는 안다. ‘우리 모두의 재판관 앞에서(171p.) ‘영주는 결국 심판을 당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오도아르도의 판단에 앞서 비이성적인 체계가 자리하고 있지만 오도아르도의 복수는 오직 영주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물을 수밖에 없다. 어떤 합리성으로 하여금 오도아르도의 선택은 합리적인 것이 되는가? 그것은 오로지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진리에 다가서고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인 것인가 아니면 계몽주의적 서사라는 이야기 거푸집을 통해 획득된 합리성인 것인가? 1772년에 발간된 희곡이 2024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는 것 자체가 가혹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에밀리아 갈로티>에서 드러나고 있는 합리성은 오로지 그 서사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작품의 계몽적 기능에 회의적이다.